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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신 부모님과 잘 살고 있습니다.

돌보는 사람들. 김장하며 돌봄을 생각한다.

by momhealer 2023. 12. 3.

이번김장은 작은 아버지집에서 하기로 했다. 

작은아버지네는 아빠의 8남매 중 막내남동생이다.

할아버지대에 이어 농사를 계속 지으면서 시골마을을 떠나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딸 둘에 아들 둘을 낳고 그 자식들이 서울로 다른 지방으로 직장과 가족을 꾸리러

떠난 후에도 두 부부가 마지막까지 쌀농사, 밭농사를 일구었으나 작은아버지는 오토바이 사고로 몇 번 입원하고

나이 들면서는 치매가 왔다. 시골에서 논농사일에 밭농사에 젊어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작은엄마는 허리가 ㄱ자로

꺾이더니 늘 말썽이던 무릎관절 수술 이후 나아지기는커녕 혼자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져서 작은엄마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몇번 정신없이 집 나간 작은아버지를 찾아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고 나에겐 사촌인 명이가

일주일에 몇번씩 집에 들린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더니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작은아버지를 근처 요양시설로

모셨는데, 그곳에서 올해 돌아가셨다. 시설로 들어간지 채 1년도 못돼서 말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1년도 못돼서 우리 사촌들은 병원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런 자리에서야 만나게 되는 우리 처지와 나이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한 걱정들을 하다가 다른 때 시간 내서 보기 

힘드니 김장이라도 같이 모여서 담그자라는 말에 바로 김장모임이 조성되었다.

작은어머니네는 네자녀와 그 배우자들이 시골 임실 작은어머니네서 해마다 모여서 김장을 해 왔으니 우리만 

더 합석하면 되는 모임이였다. 

 

나는 작은아버지 장례식장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다.

우리 사형제 중 큰언니와 막내 남동생이 장례식장에 내려갔고, 둘째 언니와 나는 간병선생님의 공백속에서 엄마를 번갈아 가며 돌봐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봐주시던 간병선생님이 본인 공부를 위해 일주일도 채 안 남겨놓고 그만두겠다고 말하곤 그만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습하느라 다른 간병선생님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의 한달간 보호자들이 돌아가며 엄마를 간병하는 중이라 힘든 상황이였다. 

상황이야 다들 알고는 있겠지만 그래도 못내려 가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나 어릴적 방학하고  시골에 내려가면 씩 웃으며 사투리로 반겨주시던 모습과 내 결혼식장에서 작은엄마와

작은 아버지가 힘든 농사일로 까맣게 그을린 모습에 거칠고 둔탁한 손으로 내 손과 남편손을 맞잡으며

"행복하게 잘 살아라~~" 덕담해 주시던 그 진심 어린 모습도 생생하고, 엄마가 쓰러지시기 전에 늘 작은엄마와 

작은 아빠에게는 꼭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터라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인사는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었다. 

남동생이 보내준 영정사진 속 작은아버지는 어릴 적 언젠가 뵈었던 그 모습 그대로 웃고 계셨다.

그러기에 나에게 이번 김장은 김장보다는 작은어머님도 뵙고, 사촌들과도 그간 부모님 돌보고 장례 치르느라

고생했을 그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었다.

김장 당일은 올해 첫 영하로 날씨가 급격하게 떨어져 동파에 주의하라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마당에서

하는 김장이라 솜바지에 패딩을 야무지게 준비해서 내려갔다.

사촌명이는 전날 집에 도착해서 새벽부터 배추 씻는다고 하니 우리도 서둘러 새벽에 내려갔다.

서울은 눈이 내리다 말았는데 남녘으로 내려갈수록 눈이 많이 보이더니 전라도에는 10센티가량 눈이

쌓여있어서 내려가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엄마 쓰러지시고 처음이니 5년여 만에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에

눈님이 내려서 축복해 주는 느낌.......

 옛 시골집에 도착하니 가마솥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반가운 얼굴들이 배추 무더기 속에서 씻고, 나르고

바삐 움직이고 있다. 허리가 반쯤 꺾인 작은엄마는 아궁이 앞에서 육수를 끓이다가 고개를 들고 "누구냐?"

물으신다. 아~~ 예전모습이 그대로 있다. 사촌들과 기억이 가물가물한 배우자들과 인사를 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러 집안으로 들어가니 사촌명이 가 반긴다. 명이는 멀리 살고 있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그나마

가깝게 살고 혼자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돌봄을 자처해서 도맡아온 처지였다.

우린 보자마자 서로를 안아주었다. 

"힘들었지... 고생했어... 잘했어. 정말 잘했다."

"아니야~~ 언니야 말로 고생이 많지. 언니~~ 말 안 해도 다 알아.... "

몇 마디 나누지도 않은 이 말속에서 우린 가슴속 응어리와 고통과 슬픔이 눈물로 변하는것을 느꼈다.  

이 눈물은 생각지도 못한 감정의 해동이었고 같은 간병인끼리 느끼는 깊은 동질감이 바탕이었다.

그 말속에 들어있는 의미와 해석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건 나이 든 부모님을 간병하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통과 사회적 시선들에 대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간병의 속성을 이해받는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였다. 

 

300여 포기정도 되는 배추김치과 총각무김치, 파김치, 갓김치등 김치종류만도 네다섯 가지를 해(太陽) 있을 때

다 해치워야 하는 고강도 노동이었다.  먹는 것도 서서 배추 속 넣다가 각자 옆에 보쌈고기 몇 개씩 놔주면 버무리면서

틈틈이 허리 펴가며 버무리던 김치 속에 노란 배추 속 뜯어 옆에 놓아준 고기를 싸서 먹은 게 다지만 힘든 노동이 힘들지만은 않았다. 같이 나누고 서로가 도움이 되는 시간들 속에 뿌듯함과 동질감을 느끼며 건강한 노동이라는 것이 이런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며 돌봄이, 간병도 이런 김장과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뿌듯함이나 동질감 연민 공감등 감정이 빠진 노동만 남은 돌봄은 우리를 쉬 지치게 한다.


영국의 돌봄 제공자 권리 운동을 확립한 인물은 메리 웹스터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부모를 보살피기 위해
1954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십 년 가까이 돌봄에 헌신하고서 자신의 처지를 '가택연금' 상태에 비유하는 분노에 찬 
편지를 언론사에 투고했다. 간병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그녀의 주장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로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이런 움직임이 1970년대에 도입된 간병인 수당을 비롯한 복지 지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 돌보는 사람들/ 샘 밀스

 

메리라는 여성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이해가 된다. 

어두웠던 시대에 늘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 의해 조금씩 변해온 인간의 역사를 오늘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