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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신 부모님과 잘 살고 있습니다.

아빠돌봄 아버지의간병과 후회

by momhealer 2023. 10. 28.

전원주택으로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이사 오고 나서 실로 아빠는 우리 집에서 제일 힘이 센

분이셨다. 마당과 통해 있는 쪽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텃밭인데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 낫어도

가난과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공부에 매달리고 군인의 삶을 사신 아버지지만 봄이면 텃밭을 갈고

모종을 사다가 심고, 가꾸고 거두는 일들을 억척스럽게 하셨다.

"에고~~ 너무 힘들어요"

벗겨진 이마에 땀을 뚝뚝 흘리며 목에 건 수건이 눅눅해진 걸 보면서

"아빠, 즐기면서 하세요. 노동으로 하지 마시고...."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싱싱한 채소를 늘 맛있게 먹는 재주는 탁월한 나는 노동의

수고로움이 있어야 농사가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일축하며 밉게도 말하곤 했다. 

또 이사 온 해에 큰언니가 마당이 넓어 풀들이 너무 뻗댕기자 다니는 길을 만들자고 하더니

트럭으로 시멘트가 들어오고, 시멘트에 섞을 자갈을 몇 포대씩 사 나르더니 공사를 시작했다.

일단 주차장에 내려놓은 시멘트를 마당으로 옮겨야 하는데, 시멘트 한 푸대의 무게에 나는 몇 개 

나르지도 못했다, 아빠는 그 시멘트포대를 나르고 시멘트에 물을 섞어서 반죽을 하고 틀에

시멘트를 부어 틀모양으로 찍어내는 작업을 주로 하셨다.

큰언니를 비롯해 우리는 주로 틀모양의 시멘트가 마르면 다니고자 하는 곳에 고정된 모양의 시멘트로

길을 내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동으로 이뤄졌는데 시멘트를 섞을 때 물을 붓고 살살 섞어도

시멘트가루가 뿌옇게 날릴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끼고 했으나 덥고, 답답해한지 아빠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급한 성격 그대로 그냥 반죽을 했다. 그럼 그런 모습을 목격하곤 놀라 큰소리로

"아빠. 마스크 쓰고 해. 너무 많이 날리잖아 " 말하곤 쌩 비켜나 있곤 했다. 

또 군인이셨던 아빠는 늘 자세가 곧 곧 하고, 친구분들보다 10년은 젋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는데, 비결은 자기 관리였다. 아빠는 아침이면 꼭 걷기나 스트레칭으로 운동을 하셨다. 

우리 집은 벌레가 나와도 새벽이건 낮이건 "아빠~~~"

병뚜껑이 안 열려도 ":아빠~~~~"

를 큰소리로 불렀다. 그러면 늘 성큼성큼 다가와 처리해 주셨다......

 

어느 날 벌레가 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아빠를 부르려고 했다.

이제 불러도 올 수 없다는 현실을 지금에서야 인지한 것처럼 아빠의 상실감을 다시 한번

인지하고, 헛헛해한다. 이렇듯 종종 실생활 속 습관들이 아빠를 소환하고,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 나만의 애도시간 속으로 빠진다.

벌써 일 년이라니......

우리는 아빠를 단지 볼 수만 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쓰던 영정사진을 그대로 거실

작은 탁자 위에 단을 만들어 올려놓고 오고 가며 눈 마주치면 인사하고, 문득 생각나면 사진 속

아빠를 쳐다본다. 아마 내가 이렇게 아빠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쳐다본 것은 커서

단 한 번도 없었으리라....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는 것을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자각하게 되었다. 

우리 집 그 누구보다 건강에 신경 쓰고, 힘이 세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던 아빠는 

이사 온 후 1년 반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셨다. 서울에 살 때는 출근하듯이 주 5일을

용산동기회사무실로 소일거리 삼아 나가셨는데, 광주로 이사오고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또 어쩌다 나들이로 점차 횟수도 줄고 아빠가 위암판정을 받은 후에는 거의 집에서만 계셨다. 

입으로 넘기는 것을 힘들어하며 눈에 띄게 하루하루 말라가면서 거동도 힘들어지셨다.

어느 날 내가 엄마옆에서 자는 날이었다. 옆방의 아빠도 끙끙 앓으시고, 엄마는 엄마대로

자세변경과 석션(가래흡입)으로 자다 깨다 하다가 아침이 되었다. 

엄마 식사를 챙겨드리려고 준비하려는데 잠이 깬 아빠가 힘들어하신다. 

엄마방과 아빠방을 왔다 갔다 하며 아빠등도 두드리다, 찜질팩도 갖다 드리다,

밤새 머리맡에 던져놓은 가래 뱉은 휴지들을 뭉쳐서 갖다 버리는데 피곤함과 짜증이

올라온다. 엄마도 중증환자이고, 아빠도 중증환자인데 두 분을 같이 돌보는 것은 내 능력밖의

일이 틀림없다.  난 아이 셋을 다 일 년 넘게 모유로 키웠다.

아이들 신생아 때 젓먹이려고 두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 아기 돌보는 것보다

밤새 엄마석션하고 자세변경 하는 것이 더 힘들다. 그런데 옆방의 아빠는 아빠대로 끙끙 소리를

내며 뒤척이니 엄마 보고 나면 힘들어도 아빠도 돌봐드리지 않으면 서운하실 듯해서

결국 두방을 왔다 갔다 하다 날이 밝았다. 이젠 한계다. 엄마는 식사 때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자연치유도 하시라고 베란다에서 식사를 드리려고 노력한다.

엄마 경관식식사를 준비하고 휠체어로 옮기며 아빠도 식사를 하셔야 하는 시간이어서

아직 자고 있는 큰언니를 불렀다.

"언니~~~~"

대답이 없다. 

"언니~~~ 나 엄마랑 나가. 아빠 좀 봐줘"

그때 언니방문이 벌컥 열리며 언니가 소리친다.

"야~~ 나도 잠이 안 와서 새벽에서야 겨우 잠들었어. 엄마가 꼭 나가서 드셔야 해?

그냥 안에서 드시고 네가 아빠도 봐드리면 되잖아. 나도 피곤한데, 왜 나를 깨워?"

........

' 뭐 지금 밤새 엄마옆에서 간병한 사람에게 본인 잠 못 잤다고 짜증을 내?

 엄마 병원에 있을 때도 집에서도 밤중 간호는 안 하는 사람이?

 뭐 엄마랑 아빠를 같이 보라고? 너나 그렇게 해보고 얘기해! '

그러나 무서운 얼굴을 하고선 이층에서 내려다보며 소리치는 언니에게

난 마음속 외침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다.

서러움과 분노로 눈물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큰소리에 남동생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오고 난 엄마휠체어를 밀고 그대로

나와서 한참을 울었다. 

나에겐 그렇게 아빠까지는 돌봐드리기 힘들고, 아빠는 식사를 주로 담당하는

큰언니가 돌봐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가 고통이 심해져

집에서 계시다 샘물호스피스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전화가 와서 간병이 처음인 

큰언니랑 있는 것이 불편하셨는지

"미라나..... 네가 좀 올 수 있나.... 네가 좀 와 있어라...."

하셨을 때 바로 달려가지 못하고, 낼모레 간다고 말한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

내가 들어가려고 전날 코로나 검사받고 짐 챙겨놓고 잠들었는데

들어가기로 한날 새벽에 돌아가셨다. 

 

환자를 한분 돌봐드리는 것도 힘든데 아빠마저 아프니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내가 아빠에게 살가운 딸도 아니었고, 친한 부녀지간도 아니었다.

늘 나에겐 엄마가 우선이었고, 엄마가 병원에 장기입원하고 계실 때 간병엔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게 병실을 매일 도장 찍듯이 왔다 갔다만 하는 아빠에게 화가 났었다.

입으로만" 니들이 힘들어서 어쪄냐...."라는 말도 듣기 싫었다. 

아빠가 병원에서 암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얘기했을 때도 설마.. 별거 아닐 거야

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아빠는 암선고를 받고 무관심 속에 빠른 속도로

나빠지셨다. 

어른들 건강은 한순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이젠 안다. 

가족들이 신경 쓰지 못할 때,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나이 드신 분들은 본인들의 생명을

지켜낼 동아줄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놓아버린다.

한동안 나는 아빠를 집안 여기저기서 문득문득 느꼈다. 

나를 찾는듯한 목소리도 들은 듯했고 엄마옆에 앉아계신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 느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예물보 정정란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