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험회사를 두 번 다녔고, 두 번 퇴사했다. 퇴사의 이유는 두 번 다 언니들의 권유에서 관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둘째언니가 너무 바쁘다며 같이 일 하자고, 일손이 달리는데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랑 둘째언니가 한복그림화실을 운영했었는데, 엄마는 그림을 도매상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하셨고,
둘째 언니는 그림 그리는 직원 3명을 두며 그림디자인과 염색을 하느라 잦은 밤샘 작업과, 주문 들어오면
시간 내에 작업을 맞추어야 했지만 직원들이 못 그리는 동양화 작업이나 염색은 혼자 맡고 있었기에
보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내가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도와주어야지....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는데 직장과 병행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회사를 그만두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8년 차 회사를 관두고 언니랑 한복화실에서 방배동 한복매장까지 오랜 시간 같이 일했다.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태어나서 세명의 자녀를 둔 엄마이자 배우자이자 자식이자 서비스업종사자였다.
언제부턴가 우리 가족의 생계는 나 혼자의 벌이로 충당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매장수입의 대부분이 생활하는데 들어갔다.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우리 5 식구가 같이 사는 대가족으로 형성된 보기 드문 가족형태로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는
공동체로 같이 벌어 같이 쓰지만 최우선은 늘 아이들이었고, 그것은 나보다 부모님이나 언니가 더 극성으로 챙겼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부분도 있어서 내가 아이들을 혼내다가 나와 엄마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늘 매장일로
늦게까지 일하지만 집안일 (식사 챙기기) 도 바라는 아빠에게 엄마는 불만이었고, 아빠는 수입이 없는 남편을, 나는
아이들 앞에서 큰소리로 남편을 혼내는 아빠를, 아이들에게 나처럼 신경 써주지 않는 남편에게 화내고, 탓했다.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들과 또 아이들과 가족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붓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
그 뒤를 든든히 버텨주는 언니와 작업하며 느끼는 소소한 행복들 그리고 꿈이 있어서 버티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우리 5 식구의 경제적 독립을 못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고 수입이 없는 남편이 하루 한 갑의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그 돈 모아서 아이들용 돈이라도 주지라며 탓하는 부모님과 언니의 눈치가 보였고, 계절을 확실히 타는 사업이기에
하이에나처럼 신경이 곤두서기 일쑤였다.
그래서 다시 매달 봉급이 나오는 생활을 하기 위해 취직을 했다. 정식직원이 아닌 같은 보험회사 디렉트 직원으로....
이 년쯤 다녔을 때 엄마가 뇌출혈로 쓰려지셨고, 24시간 간병을 해야 하므로 둘째 언니랑 나랑 돌아가며 엄마간병을
했다. 세 명이 운영하던 매장에 두 명이 빠지니 매장은 더 힘들어졌다. 그때 큰언니와 경일이가 분양사업으로 돈을
잘 버는 시기여서 그나마 병원비걱정은 덜 해도 되었다.
한 달간의 간병휴가가 끝나갈 무렵 큰언니가 계속 얘기를 했었던, 회사를 관두고 엄마 간병을 하는 게 맞는 거 같다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난다고 엄마의 병세는 쉬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때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엄마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었기에 둘째 언니 혼자 엄마를 돌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식구가 엄마를 돌보기는 힘든 상황. 장기간의 간병이 필요했고 자진해서 엄마를 보겠다는 둘째 언니와
다른 한 명이 더 필요했다. 그나마 남편이 월 이백만 원의 수입이 있었던 시기여서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조카가 대학교 들어가는데 모른 척하겠니...' 월급보다 대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아이들의 혜택을 아쉬워하는 나에게
뭘 그런 걱정을 하냐며 큰언니가 한 말이다.
큰언니와는 30대에도 금전적인 문제로 크게 상처를 입은 적이 있기에 둘째 언니 때처럼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민이 되었다. 이제 두 아이는 곧 대학에 진학할 텐데, 보수는 작아도 4대 보험과 대학입학금과 등록금이 나오는 이곳을
떠나기 쉽지 않았고, 나이가 있으니 다시 재 취업은 쉽지 않을 터 엄마간병 이후를 생각 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매일매일 치러야 하는 엄마의 빈자리와 병원간병생활 속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과 결정은 지속되기 힘들었다.
지금 바로바로 처리해야 할 것들만 신경 쓰기에도 지쳤다.
의정부 아파트를 정리하고
회사에 사표를 쓰고
매장을 정리하고
그리고 선택의 폭이 없는 상태로 언니가 살던 성북동 집으로 들어갔다.
불편한 도현이와의 동거와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과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늘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머릿속 모든 생각들은 부유하듯 떠다녔고, 그중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없는 듯 느껴졌다.
일주일에 3일은 병원 엄마침대옆에서 자고 생활했고,
3일이 지나면 다시 집으로 와서 어색한 살림과 터전을 돌보았다.
남편과의 사이도 점점 더 멀어졌고, 병원생활에서 오는 불안감과 불편함과 감정의 온도차를 누구와 나눌 수도
대화할 상대도 없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고립되어 갔다.
그즈음 책을 읽었다. 생각이 필요했고, 돈이 필요했고, 정리가 필요했다.
돈의 속성
부의 추월차선
월급쟁이 부자들
김미경의 리부트....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자기 개발서와 돈공부를 하게 되었고 인터넷강의와 자기계발 관련 채널들을 들으며 경제적 자립과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하나의 답을 찾는 길로 들어섰다.
책을 읽는다고 강의를 듣는다고 훤하게 길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 길을 걷다 보면 그 언제쯤에는 나 스스로 내 길을 찾지 않을까? 찾을 수 있을 거야 하는 다독임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바라보며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엄마를 돌봐드린 지 5년간의 세월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라도 감히 잣대로 잴 수 있고,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나에게 휘두를 때 휘청거리며 상처받고 좌절하며 그대로 곤두박질치지만 그것은 그렇게 부른 그 사람의 탓이라기보다 내 행동에 대해 나의 말을 하지 않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마라
-- 마사 킨더 --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책을 읽다가 지금 내가 느끼는 그 감정을 정리한 문장과 마주쳤다.
내 삶을 다른 사람이 재단하도록 놔 두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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